금주(金州)의 농민항쟁

작성일
2018-08-28 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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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복원과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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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에 권문세족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농지를 떠나 유랑하거나 고을과 나라를 바로잡아 보려는 민중항쟁이 치열히 전개됩니다. 경상도에서는 밀양, 청도, 경주, 김해 등에서 맹렬한 농민항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신종3년(1200) 8월에 금주(金州)에서 여러 성씨의 족단(雜族人)들이 착취하는 호족(豪族)을 죽이려 봉기하였습니다. 폭동군이 무기를 들고 관아(官衙)를 포위하니 부사(副使) 이적유(李迪儒)가 지붕에서 활을 쏘아 주모자를 쓰러뜨리고 일당을 분산시켰습니다. 얼마 후 폭동군이 돌아와 외치기를 “우리들은 횡포한 탐관오리를 제거하여 우리 고을을 깨끗이 하려 하는데 왜 우리들을 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적유가 성 밖에 있는 호족들과 협공해 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충렬왕19년(1293) 정월에는 농민은 아니지만 정리(丁吏) 임대(林大)와 영리(營吏) 허반(許頒)과 김언(金彦)이 폭동을 일으켜 경상도 안렴사 유호(劉顥)를 죽였습니다. 임대는 유호에게 은(白金) 2근을 빼앗겼던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허반과 김언은 영고(營庫)의 검열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이 사건으로 금주는 한때 현(縣)으로 강등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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