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외교의 창구

작성일
2018-08-28 18:05:35
담당부서 :
가야사복원과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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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남해의 관문이었던 김해는 일본과 외교교섭의 창구역할을 하였습니다. 『고려사』문종3년(1049)에 쓰시마(對馬島) 관청이 우두머리 아키히토(明任) 등을 시켜 표류해 갔던 고려사람 김효(金孝) 등 20명을 데리고 금주(金州)에 도착하였고, 문종10년(1056) 10월에는 일본국사(日本國使) 정상위(正上位) 권례(權隷)인 후지와라아손요리타다(藤原朝臣賴忠) 등 30명이 금주(金州)에 와서 관(館)에 묵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종30년(1243) 9월의 금주(金州) 방어관(防御官)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면서 표류해 갔던 고려사람을 돌려보냈답니다. 원종12년(1271) 9월에는 몽고가 파견하는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 조양필(趙良弼)이 김해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이와 같이 김해는 고려와 일본 사신들의 직접적 왕래가 빈번한 지역이었고, 일본국의 사신들이 체재할 수 있는 왜관(倭館)도 있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명월산 아래 구랑촌에 수참(水站)을 두어 왜의 사신을 접대하였다 하는데, 수참은 현재 부산 강서구 미음동 수정마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1920년대까지 수정마을에서 지사천으로 오르는 중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하며, 일본촌(日本村)이라는 지명이 1930년대까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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