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교섭의 거점

작성일
2018-08-29 10: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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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복원과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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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3년(1421)에 경상좌도의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는 대마도 원정 때 얻은 왜선 34척이 황산강(黃山江, 물금)에서 썩고 있으니 부수어 새 배를 건조하는 데 쓰겠다고 상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마도 원정이란 세종1년(1419)에 이종무(李從茂) 등에 의해 단행되었던 대마도정벌을 말합니다. 대마도정벌의 전리품이 대동 앞의 낙동강에 매어져 있었다는 것은 대마도정벌에 김해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입니다. 1407년(태종7)의 삼포개항 이전에 구랑촌(仇郞村)의 수참(水站, 녹산 미음리 수정)에 왜관(倭館)이 있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 있었던 김해의 왜관과 통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조선초기 대일외교의 중요한 지역이 됩니다. 반면에 해안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성종16년(1485)에는 녹산의 금단곶(金丹串)에 돌로 작은 성(堡)을 쌓아 군마와 소를 기르는 목장으로 하였습니다. 고려 말∼조선 초에 왜구침략의 방어책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봉수는 남해안 일대에서 서울로 전해지던 신호체제로, 김해에서는 성화야봉수(省火也烽燧, 녹산) 분산성봉수(盆山城烽燧, 시내) 자암산봉수(子岩山烽燧, 진영)로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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