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했던 해운활동과 소금

작성일
2018-08-29 10: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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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복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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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해운의 이익이 많다고 하면서, “배로 장사하는 자의 이익은 반드시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얻어진다. 경상도에서 낙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바로 김해의 칠성포(七星浦)로 북으로 상주(尙州)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고, 서쪽으로 진주(晋州)까지 갈 수 있으니, 오직 김해만이 그 출입구를 관할한다. 김해는 경상도의 입구에 위치하면서 남북의 바다와 육지의 이익을 모두 차지한다. 특히 공과 사의 모든 소금을 판매해 큰 이익을 얻고 있다”고 하였는데, 명지도(鳴旨島)의 염창(鹽倉)에는 전국의 소금이 쌓여질 정도였습니다. 영조21년(1745)에는 명지도의 염민(鹽民)이 구워내는 소금을 곡식과 교환해 주는 산산창(蒜山倉)이 대동면 예안리 마산에 세워져 소금 2석에 찧은 쌀(搗米) 1석을 바꾸어 주었는데, 염민을 상대로 하는 정부의 고리대금업 같은 성격도 강했습니다. 처음에는 1,500석의 쌀을 두고 매년 11월에 대출하고 2배로 거두는 이자를 챙겼습니다. 결국에는 20,000석까지 불어나고도 남아 나머지는 진주의 가산남창(駕山南倉)으로 옮겼습니다. 김해의 왕성한 소금의 생산과 교역에 정부의 고리대금업이 기생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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